
새로운 서평전문지
『서울리뷰오브북스』 0호를 내며
저자는 세상에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책을 씁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새롭게 경험하기 위해, 세상의 모순을 고발하고 사람들 사이에 연대를 만들기 위해, 삶 속에 숨어 있는 행복하고 부조리한 순간을 드러내기 위해, 자연과 사회를 관통하는 질서와 패턴을 보여 주기 위해 책을 씁니다. 좋은 책에는 저자가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하고 증류한 경험과 생각, 성찰과 혜안, 비판과 조언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책의 고유한 역할과 소명은 길게 지속됩니다.
독자 역시 변화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어제보다 많이 알고 똑똑해지기 위해, 더 현명해지고 더 용감해지기 위해, 선택의 순간에 필요한 지혜를 얻기 위해, 타인의 경험과 사색에서 통찰을 빌리기 위해, 역사와 철학과 문학과 과학에 길을 묻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과 생각을 반추해 보는 일은 어렵지만 즐거운 작업입니다. 이 즐거움은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점점 더 커집니다. 독서는 고독하고 서늘할 정도의 개인적 침잠인 동시에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뜨겁게 손을 잡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책과 만납니다. 서점은 독자가 책을 직접 보고 만지고 넘기면서 책과 대면하는 오래된 공간입니다. 미디어를 통한 광고도 독자와 책을 이어주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매체는 서평입니다. 신문과 잡지, 학술지, TV와 팟캐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서평은 책을 소개하면서 저자와 독자를 이어줍니다. 특히 서평은 책의 내용만을 소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평자의 시각과 학식에 근거한 비평을 담습니다. 좋은 비평들이 그렇듯, 깊이 있는 서평은 독서를 더 즐겁고 성찰적인 행위로 만들어 줍니다. 책의 홍수 속에서 혼란스러움이 커진 지금, 좋은 서평이야말로 독서의 방향을 잡아 주는 길라잡이 등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서평은 책만큼 오래된 역사를 자랑합니다. 9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 살았던 포티우스라는 사람은 자신이 읽은 책 280권에 대한 서평을 책으로 묶어 출간했고, 이 서평집으로 ‘서평의 발명자’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습니다. 17세기에는 셰익스피어 같은 문호의 저작에 대한 서평이 등장했고, 18세기 이후에는 학술지에 서평을 다루는 난이 만들어집니다. 19세기 말, 신문 『뉴욕타임스』는 서평을 싣는 지면을 따로 할당해서 책을 소개하고 비평하기 시작했으며, 1963년에 『뉴욕리뷰오브북스』 같은 서평 전문지가, 뒤를 이어 『런던리뷰오브북스』가 창간됐습니다. 특히 이런 서평 전문지들은 깊이 있는 분석과 유려한 글쓰기를 담은 서평을 통해 자신들이 다룬 책을 지성사의 이정표로 만드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서평이 아니었다면 쉽게 묻힐 책들이 세상에 소개됐고, 이는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서평은 책의 핵심을 잘 소개하며, 책의 장단점을 놓고 균형 있는 평가를 내립니다. 잘 쓴 서평을 읽으면 책을 읽은 것처럼 책의 내용과 주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책이 열어 준 새로운 지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진 한계까지도 바로 파악할 수 있지요. 좋은 서평은 책 뒤에 감추어진 세상을 불러옵니다. 급히 읽어서는 찾기 힘든 플롯과 의도는 물론, 저자가 드러내고 싶었던 것뿐 아니라 저자가 감추고 싶었던 것까지 보여 줍니다. 서평이 저자의 반론을 낳고, 이 반론이 또 다른 반론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계를 새롭게 거머쥐는 급진적 사상의 씨앗이 뿌려진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런 서평을 읽으면 책을 사서 손에 쥐고 싶어집니다. 좋은 서평은 책이라는 대상을 심장이 뛰는 생명체로 바꾸어 버립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책이 화제를 뿌리는 것만큼이나 멋진 서평이 화제가 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 제대로 된 서평을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서평 전문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책을 제한된 지면에 소개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습니다. 신문 서평은 책의 내용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것에 그치고 있으며, 그마저도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점점 축소되고 있습니다. 학술지 서평은 판에 박힌 칭찬 일색으로 ‘주례사 서평’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고요. 게다가 대부분의 학술지는 그들만의 리그로 운영되기에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조차 매우 어렵습니다. 책의 내용과 주장에 정곡을 찌르는 비평을 통해 독서의 재미와 깊이를 더해 주는 길라잡이로서의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서평의 부재라는 문제 속에서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창간의 돛을 올립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중요한 주장과 해석을 담았지만 널리 주목받지 못한 책을 발굴해서 제대로 평가할 것입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과장과 허풍이 심한 책에 대해서 비판의 칼을 들이댈 것입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좋은 책이 담고 있는 의미 있는 주장과 해석을 쉬운 언어로 소개할 것입니다. “이제 책은 죽었다”, “책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리지만,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이를 넘어 좋은 책이 세상에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 내는 역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이런 취지에 공감하는 열세 명의 편집위원과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철학(이석재), 역사(박훈),문학(권보드래), 한국어학(박진호), 정치학(김영민, 송지우), 경제학(김두얼),사회학(김홍중), 인류학(조문영), 자연과학(심채경), 과학기술사(홍성욱), 건축학(강예린),미디어(박상현)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1년 동안 이 잡지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토론했고, 1호를 내기 전 실험적 성격의 0호를 먼저 제작해서 세상에 선보입니다. 2020년 한 해를 성찰하는 특집, 중요하고 화제가 되었던 책에 대한 서평, 에세이와 짧은 소설 등 풍성한 읽을거리를 담았습니다.
앞으로도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서평 문화, 믿을 수 있는 지적 전통을 세우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와 독자의 반론과 비평에 항상 열려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번에 0호를 출간하고, 2021년 3월에 1호를 내는 『서울리뷰오브북스』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비판, 그리고 참여를 기대합니다.
편집장 홍성욱